[묵상] 선택하고, 구별해서, 세웠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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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before를 떠나서는 now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now는 나라는 존재의 얄팍한 한 조각에 불과하며,
before에 쌓인 두툼한 축적없이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1.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알았다."(렘1:5)
우리는 하나님을 의문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해 호기심을 품고 여러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에 관한 책들을 읽는다. 하나님에 관해 밤 늦도록 지껄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사정을 살피려고 가끔 교회에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키우려고 가끔씩 황혼에 넋을 잃거나 교향곡에 깊이 빠져들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계셨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주제에 대해 흥미를 갖기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엄밀하고 집중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삼으셨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이 중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중요한 존재로 골라 내셨다.
우리가 모태에서 지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아셨다.
우리가 미처 알기도 전에 우리가 알려진 바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인생의 해답을 찾느라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인생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되는데, 그분은 우리를 아는 분이요 우리의 인생에 관한 진실을 밝혀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야말로 인생의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중심이다.
만일 우리가 자아를 중심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인생을 설계하고 구상하게 되면
결국 중심에서 벗어난 이심원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사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하지 않은 세상에 들어간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제공된 삶에 접목되어 성장해 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개입하기도 전에 이미 왕성한 활동 중에 있던 다른 의지 및 운명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된다.
제대로 인생을 살려면
우리 이전에 시작되었고 우리가 아닌 다른 이(하나님)에 의해 마무리될 그런 이야기의 중간 대목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 정체성은 내가 스스로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에 대해 품게 된 생각 이전에(before) 이미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 내게 품으신 생각이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그 모든 것이 본질상 하나의 응답임을 의미하며, 내가 응답하는 상대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2.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했다."(렘1:5)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도인은 서로를 '성도'라 불렀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던지, 얼마나 노련하든지 미숙하든지 상관없이 모두가 성도였다.
성도(saint)라는 말은 그들의 행위가 지닌 질이나 덕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선택받아 살도록 되어 있는 인생의 종류, 즉 전쟁터에서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굉장한 공로를 세운 후에 부여된 호칭이 아니다 그들이 누구 편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표지였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려 일하고 계시며, 각 사람은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그분과 함께 그 일을 하도록 따로 세움을 받았다.
그분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자기 편으로 택하셨던 것이다. 즉 거룩하게 구별하셨다.
3. "나는 너를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렘1:5)
여기서 '세우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주었다'(natban)이라는 단어다. 즉, 나는 너를 여러 민족에게 예언자로 주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다. 과분할 정도로 베푸시는 분이시다. 예레미야 자신이 풍성해지기도 전에 그는 내어준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다. 그분은 자신의 아들인 예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를 내어 준 것이다. 그냥 전시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박물관에 보관하신 것도 아니다. 혹은 트로피를 늘어놓듯 자랑거리로 내놓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주는 행위는 우주가 운행되는 방식에 해당한다. 주는 것이 존재의 짜임새 속에 깊이 스며 있다.
주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에 입각해서 살려고 하는 것은 본성을 거스리는 행위다.
성숙한 제비는 새끼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고안된 그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위험한 일이 아니다.
새는 발이 있어서 걸을 수 있고, 갈고리 모양의 발톱이 있어서 안전하게 가지를 움켜쥘 수 있다.
그들은 걸을 수도 있고 매어 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새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나는 것이며,
그들이 날기 전까지는 멋지고 우아하게 최상의 삶을 살 수 없다.
우리 인생이 경우,
주는 것이 최상의 삶이다. 주는 행위야말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공기와 같다.
우리의 탄생 이전부터 우리 내면에 고안되어 있었던 행위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주신다. 그분은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분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에 대해서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에게, 이웃에게, 친구들에게, 적에게 그리고 만국에
내어준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남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조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스스로에게 꽉 붙잡힌 나머지 자기를 위해 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리는 마치 은행 계좌라는 죽은 가지에 의존해서 값진 생명을 부지하려고 애쓰면서, 이전에 써 본 적이 없는 날개같은
주는 행위에 위험을 무릅쓰고 의지하기를 두려워하는, 참으로 애처롭고 초췌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한 번도 그렇게 살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관대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삶을 더 빨리 시작하면 할수록 더 좋다.
결국에는 생명을 내어놓아야 하며, 미루면 미룰수록
독수리처럼 공중에 높이 솟았다가 급강하해 먹이를 낚아채는 은혜의 삶을 살 수 있는 기간이 더 짧아지기 때문이다.
유진피터슨,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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